시라스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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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라스 지로는 1902년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유학했으며, 1929년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사업가로 변신하여 세일 프레이저 상회 이사, 일본 식량 공업 이사를 역임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종전 연락 사무국 참여관으로서 연합군 최고사령부와 협상했다. 무역청 장관, 도호쿠 전력 회장을 거쳐 여러 기업의 임원 및 고문을 역임했고, 가루이자와 골프 클럽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1985년 사망했으며, 그의 삶은 여러 매체를 통해 재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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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스 지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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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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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본명 | 시라스 지로 (白洲 次郎) |
출생일 | 1902년 2월 17일 |
출생지 | 일본 효고현아시야시 |
사망일 | 1985년 11월 28일 (향년 83세) |
사망지 | 일본 도쿄도미나토구아카사카 (마에다 외과 병원) |
직업 | 무역청 장관, 도호쿠 전력 회장 등 |
배우자 | 시라스 마사코 (妻) |
자녀 | 마키야마 가쓰라코 (장녀) |
가족 | 시라스 다이조 (조부), 시라스 분페이 (부), 시라스 신야 (손자) |
학력 | |
학교 | 제1고베중학교 졸업 |
2. 생애
시라스 지로는 1902년 효고현 아시야시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칼리지에서 유학했다.[1] 케임브리지 시절, 영국 귀족 문화를 접하고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1] 1928년 쇼와 금융 공황으로 인해 집안이 어려워지자 일본으로 돌아왔다.[1]
귀국 후 재팬 애드버타이저에서 기자로 일하다 시라스 마사코와 결혼했다.[1] 1931년부터는 사업가의 길을 걸으며 요시다 시게루, 고노에 후미마로 등과 교류했다.[1]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도쿄도마치다시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1]
1945년 종전 후, 요시다 시게루의 요청으로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와의 협상을 담당하며 '순종하지 않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불렸다.[1] 1949년 무역청 장관을 역임하며 통상산업성 설립에 기여했다.[1]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참여하여 일본의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18]
1951년 도호쿠 전력 회장에 취임하여 오쿠타다미 댐 건설을 추진하는 등 전원 개발 사업에 힘썼다.[20] 이후 여러 기업의 임원 및 고문을 역임하며 경제계에서 활동했다. 1985년 폐렴으로 사망했으며, "장례식 무용, 계명 불필요"라는 유언을 남겼다.[3]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902-1928)
시라스 지로는 1902년 2월 17일 효고현 아시야시에서 부유한 사업가 시라스 분페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 지로의 할아버지인 시라스 다이조는 산다 번의 사무라이였으며, 메이지 유신을 지지했고, 이후 사업가가 되어 요코하마 정금 은행 사장을 역임했다.[1] 다이조는 고베 여학교 설립에 관여했으며, 학교의 미국인 교사들이 시라스 가에 하숙하면서 지로는 어릴 때부터 그들에게 영어를 배웠다.[1]시라스는 효고 현립 고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19년), 1923년 4월 케임브리지 대학교 클레어 칼리지에 입학하여 중세 역사를 공부했다.[1]

케임브리지에서 시라스는 에드먼드 빙, 스트래퍼드 백작의 조카인 로버트 세실 빙과 친하게 지내며, 영국 귀족의 스타일과 매너를 따랐다.[1] 그는 자동차에 대한 열정을 키워 벤틀리 3리터와 부카티 타입 35를 구입했다.[1] 1925년 겨울 방학 동안 그는 빙과 함께 벤틀리를 타고 지브롤터까지 유럽 대륙을 여행했다.[1]

시라스는 1926년에 학위를 받았지만, 쇼와 금융 공황으로 인해 아버지의 회사가 파산하여 1928년에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1]
2. 2. 사업 경력과 전시 상황 (1928-1945)
1928년 쇼와 금융 공황의 여파로 시라스 분페이가 경영하던 시라스 상점이 도산하면서, 시라스 지로는 유학을 중단하고 일본으로 귀국해야 했다.[1]1929년 시라스는 영자 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취직하여 기자로 일했다. 같은 해, 가바야마 아이스케 백작의 딸 가바야마 마사코와 교토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
1931년 시라스는 저널리즘에서 사업으로 전향하여, 세일·프레이저 상회에서 근무하며 이사가 되었다. 1937년에는 일본 식량 공업(후의 닛폰 수산) 이사가 되었다.[1] 세일·프레이저 상회는 메이지 초부터 요코하마에서 무역상을 하던 세일과 프레이저가 메이지 30년에 합병하여, 기관차나 병기 등의 수입과 은행 업무를 하던 회사였다.[6][10]
시라스는 사업상 해외 출장이 잦았는데, 이 시기에 주영 특명전권대사였던 요시다 시게루와 친분을 쌓았다.[1] 또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브레인으로 활동하며, 고노에와 개인적인 친교를 맺고 그의 아들 후미타카의 감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다음 해인 1940년, 시라스는 도쿄도마치다시노가야의 낡은 농가를 구입하여 부아이소라 이름 짓고, 농업에 힘쓰는 나날을 보냈다.[1] 1943년에는 사업에서 물러나 전쟁 기간 동안 농사에 전념했다.[1]
2. 3. 공직 활동 (1945-1954)
Jiro Shirasu영어는 1945년 종전 후, 요시다 시게루의 요청으로 종전 연락 중앙 사무국 참여관으로 임명되어 GHQ와의 협상을 담당했다.[1] 그는 GHQ와의 협상 과정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강경한 태도를 보였으며, '순종하지 않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불렸다.[14]1945년 크리스마스에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달한 선물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맥아더가 선물을 바닥에 놓으라고 하자 시라스는 존경을 표하기 위해 탁자를 요구했다는 일화가 있다.[2] 하지만 맥아더 기념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45년 12월부터 1946년 12월까지 시라스의 이름이 기록에 없어 이 일화의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15]
1946년 3월, 시라스는 종전 연락 중앙 사무국 차장으로 승진했다.[1] 같은 해 8월에는 경제 안정 본부 차장을 겸임했다. 1947년 6월 18일, 종전 연락 사무국 차장을 퇴임했다.
1949년 무역청 장관에 취임하여 부정부패 근절에 힘썼으며, 상공성을 개편하여 통상산업성(이후 경제산업성)을 설립했다.[1] 이러한 활약으로 "시라스 300인력"이라고 불렸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전권단 고문으로 참여하여 일본의 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18]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수락 연설문을 일본어로 작성하는 데 기여했다.
1952년 11월 19일부터 1954년 12월 9일까지 외무성 고문을 역임했다.
2. 4. 실업계 복귀와 만년 (1954-1985)
1951년 5월, 일본발송전의 9분할로 탄생한 9개의 전력 회사 중 하나인 도호쿠 전력 회장에 취임했다.[20] 같은 해 후쿠시마현의 다다미강 유역이 다다미 특정 지역 종합 개발 계획에 지정된 것을 계기로 1959년 퇴임할 때까지, 다다미강 유역의 전원 개발 사업에 정력적으로 움직여 오쿠타다미 댐 등의 건설을 추진했다.당시 도호쿠 지방에서 개발 가능한 수력의 4분의 3을 가지고 있던 다다미강[20]의 수리권을 둘러싸고, 오래된 권리를 주장하며 철저하게 항전해 온 도쿄 전력에 대해, 당시의 노다 우이치 건설 대신을 설득하여 수리권을 도호쿠 전력으로 전환하는 초법규적 조치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도호쿠 전력 번영의 기초가 다져졌다.
도호쿠 전력 퇴임 후에는 아라카와 수력 전기, 오사와 상회 회장, 다이요 어업(현 마루하 니치로), 니혼 TV, 영국 워버그 증권(S. G. Warburg & Co.)의 임원 및 고문을 역임했다. 가루이자와 골프 클럽의 이사장을 맡아 골프를 즐겼으며, 80세까지 엔진을 2400cc로 개조한 1968년형 포르쉐911S를 타고, 미야케 이세이의 쇼에 모델로 출연하기도 했다. 초대 소아라(Z10형)의 오너이기도 했으며, 그 개선점을 전달하는 형태로 사후인 1986년 1월에 출시가 시작된 2대 토요타 소아라에 대한 조언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포르쉐를 토요타에 기증하여 참고하도록 하기도 했다.
1985년 11월, 아내 시라스 마사코와 이가시・교토를 여행한 후, 몸 상태가 나빠져 위궤양과 내장 질환으로 입원, 같은 해 11월 28일 급성 폐렴으로 도쿄도미나토구 아카사카의 마에다 외과 병원에서 사망하였다.[3] 묘소는 효고현 산다시의 신게츠인이다.
아내와 아들에게 남긴 유언장에는 "장례식 무용, 계명 불필요"라고 적혀 있었다. 이 유언장의 문구는 시라스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남긴 유언의 내용과 완전히 같았다. 시라스의 묘비에는 마사코가 발안한 부동명왕을 나타내는 범자가 새겨져 있을 뿐, 계명은 새겨져 있지 않다.
3. 인물됨
시라스 지로는 화려한 경력과 수려한 외모, 독특한 미학과 생활 방식,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면모로 인해 사후에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와 관련된 서적과 특집 기사가 많이 나왔으며, 대부분 그를 "외국인(백인)에 뒤지지 않는 일본인"으로 묘사하고 있다.[23]
시라스 지로에 관한 1차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실제 그의 모습은 베일에 싸여 있다. 지로가 사망하기 몇 년 전, 낡은 가방 속 서류들을 잇따라 불태우며 "이런 것은 무덤까지 가져가는 거야"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1][22]
3. 1. 성격 및 특징
시라스 지로는 뛰어난 영어 실력과 국제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서구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으며,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지녔다.[4] GHQ와의 협상에서 일본의 국익을 옹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4] 검소하고 실용적인 생활 방식을 추구했으며, '컨트리 젠틀맨'의 삶을 동경했다.[49]영국 유학 시절 스트래퍼드 백작 가문의 로빈과 교류하며 영국 귀족 스타일의 라이프스타일과 댄디즘을 선호하게 되었다.[28] 한편으로는 자신이 무사 가문 출신임을 자각하고 일본인으로서의 긍지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29]
그는 말더듬이 있었지만, 오히려 킹스 잉글리시가 더 말하기 쉬웠다고 한다.[4] 아내 시라스 마사코 역시 "시라스(지로)는 영어를 더 잘할 정도의 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27]
다음은 시라스 지로의 주요 특징을 정리한 표이다.
특징 | 내용 |
---|---|
뛰어난 영어 실력 | 영국 유학 경험과 영자 신문 기자 경력을 통해 능숙한 영어 구사 능력을 갖추었다. GHQ와의 협상에서 영어로 자신의 주장을 펼쳐 "순종하지 않는 유일한 일본인"으로 불렸다.[14] |
국제 감각 | 서구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국제적인 감각을 갖추었다. |
강직한 성격 |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으로, GHQ에 일본의 입장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쇼와 천황의 선물이 함부로 취급되자 격노하여 맥아더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14] |
검소하고 실용적인 생활 | DIY를 즐기고, 일용품을 직접 만드는 등 검소하고 실용적인 생활을 추구했다.[4] |
컨트리 젠틀맨의 삶 동경 | 영국 귀족의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여 도쿄 교외에 부아이소를 짓고 컨트리 라이프를 실천했다.[49] |
3. 2. 취미와 기호
시라스 지로는 자동차, 골프, 스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으며, 그중에서도 자동차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4] 아내 시라스 마사코는 지로를 "죽을 때까지 오일리 보이(Oily Boy, 자동차 마니아를 뜻하는 영어 표현)[4]"였다고 회상했다.[4]그는 페이지 글렌브룩, 부카티 타입 35, 벤틀리 3리터(실차 현존), 란치아 람다(실차 현존), 포르쉐 911(초대), 랜드로버 시리즈 1(실차 현존), 토요타 소아라(초대), 메르세데스-벤츠 W116[34], 혼다 시빅(초대)[4], 미쓰비시 미라주[35], 스바루 4WD[4] 등 다양한 차를 소유했다. 특히 토요타 소아라의 풀 모델 체인지에 큰 공헌을 했으며, 2대째 소아라를 보지 못하고 사망한 지로를 위해 도요다 쇼이치로 사장과 도요다 아키오는 마사코와 함께 2대째 소아라를 타고 지로의 묘소를 방문했다.[36]
패션 감각도 뛰어나, 테틀리 앤 버틀러, 헨리 풀, 턴불 앤 애서와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테일러의 고객 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31] 루이 비통 트렁크와 백팩, 에르메스 서류 가방, 던힐 라이터, 제임스 록의 모자, 예거 르쿨트르 회중시계, 롤렉스 손목시계 등을 애용했다.[30] 청바지를 일본에 처음 패션으로 도입한 인물 중 하나로도 알려져 있다.[4] 이세이 미야케를 좋아했으며,[32] 다나카 잇코 감수하에 이세이 미야케 첫 작품집 『East Meets West』(1978년)에서 부부가 패션 모델을 맡기도 했다.[4]
DIY도 취미 중 하나로,[4] 주걱이나 소품 보관함, 이동식 테이블 등 일용품을 직접 만들었다. 이것들은 현재 부아이소에 전시되어 있다. 2009년에는 맥아더 기념관 창고에서 시라스가 설계하고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증정된 의자와 서신이 발견되었다.[37]
골프는 영국 유학 시절부터 즐기던 취미로,[4] 가루이자와 골프 클럽의 이사장을 역임했다. 골프 실력과 관계없이 "어떻게 그날 밤 술맛을 좋게 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골프를 즐겼다고 한다.[39] 겨울에는 스키를 좋아했으며, 시가 고원 기도이케 스키장과 자오 온천 스키장에 별장을 소유하기도 했다.[40][41]
채소를 싫어하여 카레라이스를 즐겨 먹었으며,[44] 위스키, 특히 맥캘란을 좋아했다.[4] 커피는 이탈리안 로스트로 가늘게 간 것을 선호했다.[47]
"컨트리 젠틀맨"(시골 귀족)의 생활을 좋아했으며,[49] 1940년 도쿄 교외 쓰루카와 마을에 자택 "부아이소"를 지은 것도 이러한 "컨트리 라이프"를 위해서였다.
아름다운 여성에게 약했던 것 같고,[51] 다카라즈카 가극단 학생과 연애를 하거나 패션 모델 마쓰모토 히로코에게 호감을 보이기도 했다.[52]
4. 평가
시라스 지로에 관한 1차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아, 실제 그의 모습은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22] 그는 화려한 경력, 잘생긴 외모, 독특한 미학과 생활 방식으로 인해 사후 일종의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관련 서적과 특집 기사가 많이 출판되었는데, 대부분 그의 용모, 행동, 행동력을 "외국인(백인)에 뒤지지 않는 일본인)"으로 묘사하고 있다.[23]
4. 1. 긍정적 평가
시라스 지로는 일본의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GHQ와의 협상에서 일본의 주권과 이익을 옹호한 점은 높이 평가된다. GHQ 요인으로부터 "순종하지 않는 유일한 일본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시라스는 영국에서 익힌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14]쇼와 천황이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전달했을 때, 선물이 함부로 취급되자 "어찌 감히 천황 폐하의 선물을 그쯤에 두라는 것이오!"라고 소리치며 맥아더를 당황하게 했다는 일화는, 시라스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14] 다만, 맥아더 기념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일화의 신빙성에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15]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서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수락 연설문을 일본어로 작성하도록 주도한 일화 역시 유명하다. 시라스는 외무성이 GHQ의 승인을 받아 영어로 작성하고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연설문 초안에 격노하여, "강화 회의라는 것은, 전승국의 대표와 동등한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영광스러운 날의 원고를, 상대방과 상의한 후에, 상대방의 말로 쓰는 바보가 어디 있나!"라고 일갈하며 일본어로 연설문을 고쳐 쓰도록 했다.[18]
시라스 지로는 "나는 자원봉사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일본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4. 2. 비판적 평가
- "시라스 씨는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여자에게 너무 인기가 많았던 것이 안 좋았어요." - 시카우치 노부타카[68]
- "유창한 영어로, 사람을 깔보며 이야기하는 점은, 좋아할 수 없었습니다." - 헨리 스콧 스토크스(뉴욕 타임스 도쿄 지국장)[69]
- "요시다 측근으로 활약했던 쇼와 20년대 후반에는 평판이 좋지 않았다. 높게 평가받게 된 것은 요시다 씨와 마찬가지로, 사후 얼마 지난 후였다." - 이누이 마사토[70]
- 시마지 가쓰히코는 전쟁 시에는 솔선하여 최전선에 나서는 것이 왕실이나 귀족의 자제들의 의무인데, 시라스 지로는 전시 중에 징병을 기피한 점에서 신사도에 반한다고 평가하고 있다.[71]
4. 3. 한국의 관점에서의 평가
시라스 지로는 일본의 전후 복구와 경제 성장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활동은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회의에 전권단 고문으로 수행했을 때, 한국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무시하고 일본의 입장을 옹호한 점은 비판받아야 한다.[18] 그는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영어 연설 대신 일본어로 연설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지만,[19] 이는 일본의 "존엄"을 위한 것이었을 뿐, 한국의 입장은 고려되지 않았다.더불어민주당은 시라스 지로의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그의 한계를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친영, 친미적 성향과 일본 우익적 관점은 한국의 입장에서는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5. 유산
시라스 지로는 1985년 11월 28일 8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의 아내 시라스 마사코는 일본 미술품 수집가이자 전문가로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다. 시라스 마사코가 1998년에 사망하고 3년 후, 그들의 집인 '부아이소'는 박물관이 되었다.[3]
시라스 지로는 2009년 NHK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4]
6. 가족 관계
배우자 | 시라스 마사코 (백작 가바야마 아이스케의 딸) |
---|---|
장남 | 시라스 하루마사 (전 도호 토와 사장, 아내는 미즈노 시게오의 차녀 루미코) |
차남 | 시라스 카네마사 (아내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장녀 아키코) |
장녀 | 시라스(현·마키야마) 케이코 (구 시라스 저택 부소소 관장, 남편은 마키야마 코조의 손자 케이오) |
손자 | 시라스 신야 (카네마사의 장남, 전 내각총리대신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공설비서, 아트 프로듀서, 에세이스트, 주식회사 지팡 대표이사)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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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가바야마 스케노리의 장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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